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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솔고개마을 뒷 목재에 있는 유길순 효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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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고개 마을 지명은 뒷 목재 고개에 있는 큰 소나무에서 유래 되었다. 그 고개에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마주보고 있었는데 한 그루는 오래전에 고사했다. 효열각 맞은편에는 현재도 낙락장송 소나무가 듬직하게 버티고 있다. 그 소나무에 단오절에는 그네를 매고 마을 사람들의 잔치마당이 펼쳐진 장소이기도 하다. 그 소나무와 마주보고 증조할머님의 효열각이 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행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의 힘과 의미를 후세에 말없이 들려주고 있다.  변화하는 시대의 조류에 밀려 그 의미가 날로 퇴색되어 가는 전국 각지의 효열각과 열녀각들이지만 이지만 그 속에는 우리들이 아직도 잊지 않고 따를 만한 인간에 대한 충분한 사랑의 힘의 깃들어 있고 선조들의 삶이 들려주는 인간에 대한 예의와 순수가 온전히 남아 있다.

비록 자식들 중에 세상에 이름을 떨친 출세는 없었어도 증조할머니의 지아비에 대한 사랑은 후세에 전해져도 부끄럽지 않은 사랑이다. 살아서 병든 지아비를 위한 정성스런 간호와 기도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인간의 예의이자 아름다움으로 남을 것이고, 사후에 지아비를 기리는 가슴과 정성은 먼저 떠난 사랑에 대한 간절한 작별인사가 아니겠는가? 솔고개 마을에서 바라보면 단양의 명산 금수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있다. 그 금수산 영봉 밑에 병든 지아비를 위한 3년 동안의 기도는 사랑의 약이 되어 되돌아 왔으며, 그 때 남긴 한 여인이 만든 사랑의 발걸음은 오솔길이 되었다. 그 오솔길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그 길 위로 남긴 증조할머니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가슴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효열각과 금수산의 추억 속에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어 우리들의 가슴속에 옹달샘이 되어 있으리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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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강산 학운산방 길을 가면서 그 효열각 담 넘어 에서 갈비를 쓸어 담는 어머이를 바라보며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들이 떠올랐다. 갈비... 예전에는 불쏘시개로 갈비를 사용했다. 그 갈비는 나무들이 자라는 거름이 되는 자연의 순환 고리에 있어서 중요한 퇴비지만 70년대 중반 까지만 해도 시골에서 연료는 거의 잡목과 나무 부스러기였다. 그래서 나무를 하면서 갈비는 집집마다 부엌 광에 들어 있는 생활필수품이다. 그 갈비를 하지 못하게 면 산림계에서 단속 나오고 숨기고 하는 숨바꼭질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단속에 걸리면 벌금도 물고, 산림계의 완장은 인민위원장의 권력보다는 작아도 권위주위의 상징처럼 서민의 가슴을 억누를 수 있는 완장의 마력이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갈비를 하지도 나무를 하지도 않는 시절이지만 마대포대에 갈비를 담는 어머님 모습 저 뒤로 손자며느리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시는 증조할머니가 계셨다. 적어도 어머니는 할머니와 증조할머니로부터 충분히 그런 미소를 받을 자격이 있는 우리시대의 서정을 간직한 며느리가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 어머니라서가 아니라 이 시대의 여인으로, 이 시대의 농사꾼으로, 이 시대의 며느리로 참 좋은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한 없이 드리고 싶다. 그래봤자 생각이지만 생각만이라도 증조할머니 효열각 소나무 아래에서 갈비를 쓸어 담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한 마리 학과 같다는 담배 따러온 아낙네가 들려준 어머니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못난 아들이지만 당신의 아들로 태어나 이 땅에서 함께 숨 쉬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독백이라도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어찌 아니 말 할 수 있겠는가?

소구리 하우스에서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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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솔곡개마을 뒷 목재 효열각 소나무 군락 2007

유길순 효열각(劉吉順孝列閣)

위치 :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기동리 솔고개

유길순(1886~1965) 본관: 강릉 시조: 문양공 전 출신: 충북 단양 부:최병극 본관: 영흥 시조: 천호장 종직의 23세손 현조: 문하시중 불탁의 20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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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품이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어렸을 때부터 보모의 뜻을 어긴적이 없었다. 혼기가 되어 최씨 가문에 출가한 후에는 시부모를 극진히 섬기고 부군을 잘 받들 뿐만 아니라 이웃간에 화목하여 칭찬이 자자하였다. 부군이 병들어 자리에 눕게되자 정성껏 약을 달여 드리며 구완에 힘썼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여 병세가 위독하매 금수산영봉 아래 제단을 쌓고 날마다 하늘을 우러러 부군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천지신명에게 눈물로 간구하여 부군을 병에서 놓여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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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좌측이 청운이 우측이 고운이^^ 솔농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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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솔농원 이에요? 솔농원의 유래에 대하여 물어보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솔농원이 있는 뒷 목재 고개마루에는 큰 소나무 두 그루가 고갯 길에나란히 있었답니다. 현재는 증조할머님 효열각 앞에 있던 소나무는 오래전에 고사했지만 길 건너에는 아직도 낙락장송이 빼어난 자태와 우람한 풍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을 지명이 솔고개가 되었고 그 솔고개나무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솔농원이란 이름은 80년대 중반에 지었습니다. 특별히 나무를 키우는 농원도 아니지만 솔고개 마을에서 농사 짓는 집이란 의미가 솔농원 이름에 깃들어 있습니다.

비록 특별한 작목을 재배하는 농가는 아니지만 미래 영농에서 농사짓는 집도 브랜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 당시 간판도 3개 만들어서 무수마골 삼거리에 공익 버스정류소 표지판도 한개 만들어서 같이 세우고 곧은터 삼거리에도 세우고 마지막 하나는 솔고개 마을 어귀인 앞재넘어에다 세웠습니다. 2007년 현재 무수마골 삼거리 간판은 관리 부실로 녹슬고 찌그러지고 해서 솔직히 보기가 좀 민망하지만 그렇다고 이젠 특별히 신경써서 관리하는 솔농원맨도 없습니다. 곧은터 삼거리에 세웠던 솔농원 간판은 어디에 있는지 몰라도 현재는 없어 졌습니다. 그래도 앞재넘 고개마루에 서 있던 간판은 아래 쪽으로 약간 이동되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솔농원을 찾아오는 친구들 한테 반가움의 미소를 만들어 주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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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비교적 빠르게 인터넷에서 솔농원과 단양팔경 홈페이지가 1996년 3월달에 오픈하여 광활한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자연속에서 흙과 함께 살아가는 솔농원의 서정을 좋은친구들과 공유하며 지냈던 즐거운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만든 솔농원 브랜드 덕분에 요즘 왠만한 지도책에는 솔농원이란 표시가 나오기도 합니다. 사이버에 정겨운 초막처럼 존재했던 솔농원 홈페이지는 몇몇 대중매체에 소개되기도 하고 그로 인해 텔레비젼과 신문의 취재 요청도 서너건 있었지만 당시 바쁘기도 하고 또 미디어에 노출되어 세속의 길을 걷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과감하고 정중하게 취재협조 요청을 거절 하였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잼이로 할걸 그랬나 생각도 듭니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신문사의 한 곳에서 주말판 특집으로 신문 반쪽 만하게 나올거라는 제의를 뿌리친 것은 어찌 보면 그 만큼 솔농원을 아끼는 가슴이 선택한 순수이자 염치가 아닐까 생각 되기도 합니다. 그랬던 곳이 솔농원 입니다. 그 솔농원이 제4세대를 이끌어갈 영맨들이 고운이와 청운이 입니다.

아주 오랬동안 선대의 정착지로 부모님 세대의 땀과 열정, 희생이 깃들고, 3세대 솔농원맨들의 사랑이 깃든 솔농원이 뒷 목재 고갯마루의 소나무처럼 오래오래 푸르른 기상으로 존재 하기를 바랍니다.
 

진^^